2011년 통권 제7호

목차

편집부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2-3 (2 pages)

권두언

김창남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5-10 (6 pages)

일반논문

랩과 노래의 정보량 차이와 그에 따른 역할 분화

권지훈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11-35 (25 pages)

초록
음악이 높은 ‘복잡성’과 ‘불확실성’ 등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일컬어 높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대중음악과 같은 경우에서 너무 높은 정보량을 지닌 난해한 음악이나 지나치게 시적인 가사를 사용하게 되면 대중은 그 음악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대중음악의 창작자들은 여타의 음악들보다 ‘예측 가능’하고 낮은 엔트로피를 지닌 음악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랩이라는 신종 양식은 고전적인 의미의 노래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기에 초기 랩송의 창작자들은 생소한 랩이 야기하는 높은 정보량을 낮추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는 서태지 등장 이전 시기에 랩이 삽입된 대중가요를 대상으로 랩과 노래의 관계맺음을 서로가 수용하고 있는 정보의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서태지가 랩 음악을 전면으로 내세워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기 전에도 국내 랩은 상당히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이 변했나>에서는 랩이 곡에 삽입되면서 노래와의 구조적 충돌로 인해 의미 차원에서 높은 정보량이 나타남을 확인했다. <그건 너>에서는 랩의 음악적 정보량 조절을 통해 긴장을 조성하고 노래 파트에서 해결하는 방식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 보이네>와 <슬픈 마네킹>을 통해서는 랩과 노래가 서로 다른 의미 구조를 지닌 채 부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나타났다. <인디안 인형처럼>(Rap version)에 나타난 가수와 랩퍼의 분화는 이러한 부조화가 야기하는 높은 정보량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더불어 새로운 음악 형식을 받아들인 주류 대중음악계의 창작자들에게서 극단적인 실험까지도 진행되었다는 면을 <김삿갓>과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현 대중음악에서 대단히 큰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랩은 발생 시기부터 노래와의 다양한 관계맺음을 통해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며 발전했다. 랩의 토착화와 그에 따른 변모를 파악하는 작업은 앞으로의 대중음악을 예측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동통신사의 콘텐츠 상품으로 전락한 대중음악

한찬희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36-74 (39 pages)

초록
이 글은 디지털화와 이동통신사 자본의 부작용이 음악산업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는 글이다. 최근 10년간 한국 음악산업은 디지털화 이후 음반산업의 몰락에 따른 급속한 변화를 겪었고, 이 과정 속에서 이동통신사들이 자신들의 망을 통해 음원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게 되었다. 모바일 기기를 중심으로 재편된 음원시장에서 음악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로 나타나 미디어 형식에 따라서 그 내용이 바뀌어 가고 있다. 감상하는 음악은 자취를 감추었고 단순하게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음원만이 교환된다. 대중음악이 주 수익원인 모바일 영역에 적합한 형식의 음악들 위주로 생산되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음악이 모바일에 기생 혹은 흡수된 결과이다. 벨소리와 통화대기음의 범람은 감상용 음악을 액세서리와 같은 장난(감)용 음악으로 바꾸었다. 손 안에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모바일 기기의 형식이 콘텐츠의 형식에 영향을 준 것이다. 대중음악이라는 문화형태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또한 노골적인 방식으로 이동통신사의 자본이 창작과정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대중음악의 퇴행적인 모습으로 비판할 수 있다.

가야금 창작음악의 대중화 양상 고찰

정길선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75-98 (24 pages)

초록
국악 창작음악은 발전과정에서 독주·중주·관현악 장르의 음악으로 다양화 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이후 영화음악이나 무용음악이 국악으로 만들어지면서 대중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악 실내악단 ‘슬기둥’이 창단되면서 국악가요 등으로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국악의 대중화 움직임은 여러 실내악단이나 중주단의 등장을 이끌어냈으며, 국악기의 개량 또한 활발하게 촉진시켰다. 악기 개량은 가야금에서 가장 폭 넓게 나타나 7음 음계 구조를 수용한 25현 개량가야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통적인 선율이나 장단, 음계를 활용한 곡보다는 서양 클래식이나, 고전 팝송, 외국 민요, 영화음악 등의 선율을 편곡한 곡들이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25현 개량가야금에 의한 가야금 창작음악의 대중화 작업이 연주자와 작곡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가야금 창작음악은 초기 순수 창작음악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음악 장르까지 수용하면서 퓨전, 크로스오버 등 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음악으로 나아가고 있다.

Western Tonal Aesthetics in Kim Min-ki’s Composition

Okon Hwang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99-128 (30 pages)

초록
When the U.S. folksong movement of the 1960s was absorbed into Korean culture during the early 1970s, it helped creating a huge cultural phenomenon known as a ‘tong-gita bum (acoustic guitar phenomenon)’1) in South Korea. One of the most influential tong-gita singers of this period was Kim Min-ki. He obtained an acoustic guitar (tong-gita) during the late 1960s and taught himself to master the instrument in the style of the U.S. folksong movement. Soon, he started to compose his own songs and eventually became acquainted with other singers with a similar musical interests, thus helping to create a musical ― and soon expanded to a huge cultural ― phenomenon called ‘tong-gita bum,’ which continues to influence the popular music industry of the present day South Korea. 
Although the lyrical content of Kim’s early songs during this tong-gita period demonstrated a marked desire to break away from the Western hegemony by emphasizing the ideological struggles of Korean intellectuals, their melodic and harmonic orientations were firmly rooted in Western tonal music theory. This paper will examine the tonal aesthetics of Kim Min-ki’s early compositions written during the 1970s in order to determine the extent to which the Western musical influence subconsciously and thoroughly infiltrated the aural aspect of his compositional output.

1945년 이전 일본 대중가요 음반에 나타난 조선인의 활동

이준희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129-157 (29 pages)

초록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 즉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는 동시대 일본 대중가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조선인 대중음악가들이 일본 대중가요계에서 활동한 흔적 또한 찾아볼 수 있는데, 음반 자료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1930년대에 보이는 조선인의 일본 대중가요 음반 관련 활동 내용을 보면 채규엽, 김영길, 이난영, 이규남, 나선교 등 가수가 열 곡 이상으로 비교적 많은 작품을 발표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조선인들의 활동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우선 일본 대중가요에서 중요한 유행 요인으로 작용한 이국취향을 들 수 있는데, 조선인 가수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 유독 <아리랑>이 많은 것으로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인 대중음악가나 조선 대중가요가 일본 대중가요의 주류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 위에서 본 다섯 명 외에는 그 활동이 대부분 일시적인 수준에 그쳤다.
음반회사의 일본 본사와 조선 지점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음악산업 체제 또한 조선인의 활동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으니, 조선의 음반회사 전속 상황이 일본 활동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시기의 음악산업 체제는 물론 동등한 관계 속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일본인이 조선 대중가요에 주로 작곡자나 편곡자로 활동한 점과 조선인이 일본 대중가요에 주로 가수로 활동한 점은 그러한 불균등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조선인의 일본 대중가요 관련 활동은, 결국 당시 문화 전체를 규정하는 전제였던 제국 질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시인문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 대중음악과 현대성 : 이영훈의 작품을 중심으로

정윤수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158-184 (27 pages)

초록
현대 혹은 현대성이란, 전통 사회의 익숙했던 공간이 전면적으로 해체/재구성되는 과정이다. 도시 공간의 급변과 재구성은(발터 베냐민이 프랑스 파리의 현대성에 주목한 바와 같이) 동시대의 시민들의 내면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발달한 대중산업사회를 토대로 발전해온 대중음악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대도시의 일상과 정서를 소재로 삼아왔다. 익숙했던 공간의 해체/재구성, 익명화된 개인들의 활기차면서도 권태로운 일상,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생활주기, 그런 상황 속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혹은 인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대중음악은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한국 대중음악의 경우, 이영훈에게서 그 일관된 관심과 음악 작업을 발견할 수 있다. 대도시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음악가로 활동하면서도 주로 서울의 도심 공간에서 생활한 이영훈은 급속하게 변해온 거대 도시 서울의 시간, 공간, 인간 등에 대해 깊은 연민과 사랑을 쏟으며 서정적인 발라드 음악으로 이를 형상화해냈다. 광화문 광장, 덕수궁, 정동길, 가로등, 카페 등은 그의 작품에서 쉽게 확인되는 거대 도시 서울의 현대성의 서정적인 인상이다. 따라서 한국의 급변하는 도시문화의 현대성을 작곡가 이영훈의 음악세계를 통해 규명하는 것은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평론

슈퍼스타K, 절망의 처방전

서정민갑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7, 2011.5, 185-202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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