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통권 제18호
일반논문
나화랑의 민요 심취와 애호, 한국 가요사적 의의 짚어보기
민경탁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18, 2016.11, 8-59 (52 pages)
초록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8·15 해방 이전에 데뷔해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보낸 작곡가들을 흔히 제1 세대 가요 작가라고 일컫는다. 이들 중에서 각별히 신민요와 민요풍의 가요를 양산하며, 물밀 듯 밀려온 대중음악의 서구화 풍조 속에서 한국 가요의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각별히 보인 이들을 선별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김서정, 전기현, 김교성, 문호월, 이면상, 김준영, 형석기, 김해송, 박시춘, 송민영, 나화랑, 한복남, 황문평, 고봉산 등이다.
이 중에서 작곡가 나화랑의 작품 세계에 여타 작곡가에서보다 유별난 민요 심취 및 애호 성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의 민요를 편곡해 다량 음반으로 제작, 보급하였으며, 신민요·민요풍의 대중가요를 양산(量産)한 것으로 조사되기 때문이다. 나화랑은 전통민요 편곡 민요 음반을 70종, 대중가요계 신민요·민요풍의 가요 작곡 음반을 132종, 도합 202종의 민요계 음악을 남긴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우리 전통 가락 위에 그 시대의 감각을 동시대 여타 대중가요 작곡가보다 다채롭게 담아내었다. 한국 음악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려 각별히 노력했는데, 그 성과가 한국가요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신민요와 민요풍의 가요는 1940년대 중반~1960년대에 도입되는 서구의 리듬에 밀려 많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양적으로 열세에 있을 뿐, 전문국악인들의 민요보다 대중을 향한 자장은 더 넓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가요가 세계적으로 위상을 높여가는 오늘날 그 풍조가 서구적으로 지나치게 경도되어 가고 있음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힙합에 나타난 루저 남성성 담론과 여성 혐오 : 블랙넛 사례를 중심으로
김수아, 홍종윤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18, 2016.11, 60-99 (40 pages)
초록
이 글에서 필자들은 블랙넛의 가사를 통해, 한국 남성 청년의 남성성 구성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블랙넛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스타는 아니지만, 힙합 장르 내에서는 특정한 한 수용층과 교감하며 그 정서를 대변한다. 필자들은 블랙넛이 노래해온 곡들이 남성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구성해내는지를 살펴보는 한편, 수용층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지를 고찰하였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주체들은 자학이나 혐오를 선택한다는 것이 현재 온라인 중심의 남성 청년 담론에 대한 진단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힙합 가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며, 특히 블랙넛과 같이 자기 스스로를 찌질이, 루저로 정체화하는 래퍼들의 가사에서는 극적으로 표현된다. 진정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매개로 하나의 단일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찬양하면서 그에 도달하기 위한 고통을, 그리고 그 고통의 잘못된 원인으로 소수자를 지목하는 비-헤게모니적 남성성과, 돈과 여성을 자랑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 사이의 대비가 존재하는 현재 한국 힙합의 남성성 표상은 사실상 동일 기준의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국민을 위한 노래 : 해방 이후 국민가요운동의 전개와 국민 주체의 음악적 구상
심재겸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18, 2016.11, 100-147 (48 pages)
초록
1945년 해방 이후 유행가는 우파와 좌파의 모든 지식인에게 비판을 받았다. 일제 시기부터 즐겨 불리던 유행가가 가진 저속함과 퇴폐성이 대중을 타락하게 하고 바람직한 국민 주체의 형성을 가로막는다는 이유였다. 따라서 지식인들과 정부는 가요정화운동을 통해 당대의 유행가를 규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유행가를 대체할 수 있는 건전한 가요를 보급해 대중을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부 수립 이후 우파 음악가들은 국민가요운동과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5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유행가를 규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공 기관의 조직적 허술함도 그 원인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문화에 대한 자유주의적 경향 아래 강압적인 금지와 통제는 예민한 문제였다. 따라서 국민가요운동 지도자들은 유행가 규제보다 건전한 국민가요를 적극적으로 보급해 기존의 퇴폐적인 유행가들을 대체하려고 하였다. 대중에게 널리 불리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195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 국민가요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정부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였지만 때로는 무관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국민개창운동추진회의 국민가요는 대중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민개창운동을 정부 차원에서 주도하기로 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우파 음악가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우파 음악가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정부 주도의 국민개창운동은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970년 정부는 우파 음악가들의 국민가요가 대중성이 없다고 판단하며 유행가 작곡가와 가수들에게 이를 위임한 후, 이는 건전가요라고 불리게 된다.
음악 생태계 선순환을 위한 과제 : 뮤지션유니온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씬정석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18, 2016.11, 148-178 (31 pages)
초록
2013년 결성된 대한민국 뮤지션들의 노동조합인 뮤지션유니온의 연혁과 활동 과정을 살펴보고 뮤지션유니온이 활동 방향으로 제시한 3대 지향을 고찰했다. 뮤지션유니온이 집중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음원 가격과 유통의 문제, 복합장르에서의 음악 노동 착취의 문제, 뮤지션 양성 체계와 예술 노동의 문제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원인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음원 유통 플랫폼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저작물 유통체계, 그 음원 생산자들과 대중음악 공연이나 드라마, 영화, 뮤지컬과 같은 복합장르 등에 참여하는 작곡가나 가수, 배우, 연주자, 스태프 등 음악 산업종사자들이 협력하는 산업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음악 예술 활동의 주인이자, 예술 노동의 사회적 교섭 당사자 조직으로서 뮤지션유니온이 역량을 강화하고 책임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 때 음악 생태계의 선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
예술인 재능기부 담론 전환이 필요하다
강상구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18, 2016.11, 179-217 (39 pages)
초록
2008년 국제적 금융 위기 이후 늘어나기 시작한 재능기부 문화는 2010년 ‘재능을 나눕시다’ 캠페인을 거치면서 큰 폭으로 확산되었다. 예술계의 재능기부는 다른 분야보다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는데, 대중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재능기부가 특히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동시에 극소수에 해당하는 유명 예술인들의 재능기부가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면서, 대다수의 저소득 예술가들 역시 재능기부 대열에 이끌려갔다. 그리고 재능기부는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 곳곳으로 퍼져 갔다. 재정적 여건이 풍족하지 못한 민간 사회단체부터 국민의 세금을 운용하는 지자체까지 재능기부를 활성화하자는 메시지가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예술인들에게 재능은 생계 수단임과 동시에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사회는 예술가에게 재능을 많이 가졌으니 조금 내어놓으라고 이야기하는 모양새다. 이로부터 ‘타율적 재능기부’가 시작된다. 문제는 타율적 재능기부가 예술인과 수혜 단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서로 관계를 왜곡하게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본 연구 결과 많은 예술인은 타율적 재능기부에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로 인해 재능기부에 대한 필요성, 만족도, 향후 참여 의향 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술인의 재능기부에 관한 담론 전환이 필요하다. 생계 수단으로의 예술, 노동으로의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예술가의 창작적 의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재능기부 담론이 형성되길 기대한다.
기존 연구가 수혜자 중심의 재능기부 활성화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본 연구는 예술인 관점에서 재능기부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Hybridity of Cultural Nationalism in Korean Popular Music : From Saeui Chanmi to Jeongtong Hip-hop
Pil Ho Kim
한국대중음악학회, 대중음악 18, 2016.11, 218-245 (28 pages)
초록
This paper focuses on three instances of Korean popular music history – colonial popular songs in the 1920-30s, the “youth culture” of rock and folk music in the 1960-70s, and Korean hip-hop since the 1990s – in which the meaning of nation and national culture came forward and was hotly contested. Nationalism as a political ideology finds its cultural expression in popular music, but at the same time nationalist ideology can be transformed by the global nature of the music. Specifically, the hybridization of traditional, Japanese and Western musical forms in colonial pop songs, the repression of rock and folk by the authoritarian national culture doctrine, and the question of language and nationality in hip-hop are all illustrative of the hybridity of cultural nationalism in Korean popular music.
평론
기타